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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반전3: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한국 항공사의 진실과 오해

by 여름경제사람 2025. 12. 2.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지만, 실제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훨씬 더 깊고 복잡합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최초 비행의 역사와 안창남의 위치, 그리고 잊혀진 선구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상식의 반전3: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한국 항공사의 진실과 오해
상식의 반전3: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한국 항공사의 진실과 오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인가 – 잘못 알려진 사실의 진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를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안창남을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안창남은 1920년대 조선 사회에서 독보적인 항공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는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반도 상공을 최초로 비행한 한국인 비행사, 한국 사회에 항공기술의 가치를 각인시킨 국민적 영웅, 과학기술을 활용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안창남의 등장은 1920년대 조선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습니다. 1921년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곧바로 일본 내 비행대회에서 우승하며 조선인 천재 비행사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가 일본인 비행사를 제치고 우승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이 컸고, 이 소식은 조선 전역에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이후 동아일보 초청으로 고국 방문 비행이 이루어졌고, 1922년 12월 여의도에서 펼쳐진 비행은 경성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5만 명이 모일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비행사라는 명칭은 사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1920년 독립신문에는 이미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가 6인’이라는 제목의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었고, 이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장호, 이용선,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이었습니다. 공군 공식 기록에서도 1992년 이들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고 인정했습니다.

즉, 안창남은 최초의 비행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최초로 만난 항공 영웅’이자 ‘한반도 상공을 최초로 비행한 한국인 비행사’라는 것이 정확한 역사적 평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역할이 역사적 중요성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가장 대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준 조종사였고,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과학기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독보적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안창남을 둘러싼 ‘최초’ 논란은 한국 항공사의 복잡성과 다층적 역사를 보여줍니다. 기술을 통한 독립의 꿈, 조선 사회에 항공이라는 현대 기술을 알린 상징성, 그리고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그의 업적은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논란은 한국 항공사의 시작이 한 인물의 영웅담이 아닌, 여러 독립운동가와 선구자들의 노력이 겹쳐 이루어졌음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과 항공 독립운동 – 한국 항공사의 전환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단순한 비행 쇼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 항공 기술을 각인시키고 독립운동의 상징적 신호탄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1922년 12월 여의도에서 이루어진 그의 비행은 5만 명의 조선인이 몰려든 역사적 장면이었고,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여의도는 군사 목적의 간이 비행장이었지만 이날 만큼은 ‘민족의 하늘’을 상징하는 성지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비행기는 ‘금강호’라는 단발쌍엽기였고, 안창남은 남산과 창덕궁을 돌아 여의도 상공에서 다양한 곡예 비행을 선보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조선인이 만든 비행 장면은 그 자체로 강렬한 감동이 되었고, 사람들은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업적을 찬양했습니다. 당시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에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장면은 마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처럼 받아들여졌고, 조선 사회에서 항공 기술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안창남은 일본 비행학교에서 활동했지만,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중국 산시성 비행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며 조선인 비행사 육성 사업을 추진했고, 실제로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비행사가 아니라 항공 기술을 무기로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짧았습니다. 1930년 중국에서 비행 훈련 중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고, 그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활동은 조선과 중국 항일 세력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고, 이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안창남 이후에는 이기인·장덕창·신용욱 등 많은 한국인 조종사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특히 신용욱은 여의도에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해 민간 항공훈련의 시대를 열었고, 이후 KAC와 대한국민항공사를 설립하며 한국 현대 항공산업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안창남의 비행은 단순히 대중적 인기만 누린 사건이 아니라, 한국 항공사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이자 독립운동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그의 비행은 기술과 민족주의가 결합한 상징적 장면이었고, 그 장면은 한국인의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과 잊혀진 비행사들 – 한국 항공사의 숨은 주역들

한국 항공사에는 안창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여성 비행사들의 기록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영화 <청연>으로 인해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는 권기옥이며, 이는 여러 자료로 명확하게 입증됩니다.

권기옥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했고, 1925년 중국 윈난 항공학교에서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박경원보다 2년 빠른 시점입니다. 권기옥은 단순한 여류 조종사가 아니라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1932년 상하이 전투에서 실제로 일본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는 등 무장투쟁에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 국가보훈처 자료, 그리고 여러 언론 기록에서도 권기옥이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이자 ‘동양 최초 여성 전투기 조종사’였음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성 비행사들 중에서도 의미 있는 기록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윌로스 한인 비행학교의 6인(한장호·이용선·이초·오림하·장병훈·이용근)은 1920년 이미 비행사 자격을 얻었고, 대한독립을 위한 공군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한국 항공사의 기원은 사실 윌로스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20년대 한반도에 비행기가 띄워지고, 독립군이 공군을 준비하던 모습을 상상하면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비행 자체’는 일본인 나라하라가 1913년 용산에서 시연한 비행이었고, 이어 일본인과 서양 비행사들이 여의도와 용산에서 공개 비행을 이어갔습니다. 1917년 미국의 아트 스미스가 여의도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고, 1920년 이탈리아 조종사들이 유럽-아시아 대륙 횡단 비행의 일부로 조선을 경유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항공기라는 새로운 기술을 직접 눈으로 보며 ‘하늘을 난다’는 개념이 현실이 된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 모든 기록은 한국의 항공사가 단일 인물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여러 인물의 노력이 겹쳐 이루어진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여성 조종사, 독립운동가, 미국 교포 사회의 비행 선구자, 중국 군벌 항공대에서 활약한 조선인 조종사까지, 한국 항공사의 뿌리는 매우 넓고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