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는 일본에서 들어왔다? 이 오래된 질문은 생각보다 복잡한 역사와 다양한 문헌을 품고 있습니다. 고추의 기원, 한국에서의 정착 과정, 그리고 논쟁의 중심을 차근히 따라가며 고추의 진짜 역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고추는 어디에서 왔을까? 세계의 이동 경로와 한국 유입 논쟁
고추의 원산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입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하며 유럽으로 들여왔고, 그 고추는 다시 아시아로 전해져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은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아히(agi)’라는 향신료를 발견했는데, 이 붉고 매운 열매가 바로 오늘날의 고추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이를 후추와 비슷하다 하여 ‘붉은 후추(red pepper)’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고추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글로벌 무대를 가로지르며 동서양을 연결한 식물입니다.
한국에 고추가 처음 들어온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흔히 알려진 통설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일본을 통해 고추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주장입니다. 왜군이 조선인을 독살하려고 매운 고추를 들여왔다는 전설도 반복되곤 했습니다. 이 설은 1984년 한양대 이성우 교수의 논문 이후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게다가 조선 후기 문헌인 《지봉유설》에서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 하여 ‘왜개자(倭芥子)’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점도 일본 전래설의 근거로 오랫동안 통용됐습니다.
그러나 학계의 최근 연구는 이 오래된 통설을 강하게 흔들고 있습니다. 한국식품연구원의 권대영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경란 책임연구원은 고문헌 분석을 통해 “고추는 일본에서 전해졌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이 발견한 핵심 근거는 놀라웠습니다. 임진왜란보다 100년 이상 앞선 1489년 《구급간이방》 에 이미 고추를 뜻하는 한자 ‘초(椒)’와 고추의 옛 표기 ‘고쵸’가 기록돼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한국에 고추가 15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1433년 《향약집성방》과 1460년 《식료찬요》에 등장하는 ‘초장(椒醬)’이 바로 고추장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추를 단순히 약재가 아니라 조미료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일본 문헌에는 오히려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건너갔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한국 고추가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사회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추의 유입 경로는 단순히 “일본 → 한국”이 아니라 “신대륙 → 유럽 → 중국 또는 동남아시아 → 한국 → 일본”이라는 복잡한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고추는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식문화의 변화를 이끈 작물이기 때문에 그 이동 경로 자체가 음식 문화사에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고추라는 작물이 세계를 어떻게 가로질러 퍼져나갔는지 이해하는 일은 한국 식문화의 성립 배경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국인의 고추 사랑과 매운맛의 문화: 왜 한국만 이렇게 매운가
한국인은 세계적으로 매운맛을 사랑하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청양고추 한 개만으로도 ‘매운맛 DNA’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질 만큼 한국의 매운 음식 문화는 독보적입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고추는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음식의 성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고추장, 고춧가루, 김치, 찌개, 양념류 등 거의 모든 요리에 고추가 들어갑니다. 매운맛을 먹고 땀을 흘리면서도 ‘시원하다’, ‘개운하다’고 표현하는 독특한 감각은 한국인의 음식 경험을 상징합니다.
고추의 붉은 색은 한국 문화에서 강렬한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조선 시대 일부 지역에서는 붉은 고추를 금줄에 달아 액운을 막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고추의 붉은 빛이 태양, 불, 생기를 의미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고추가 단지 식재료가 아니라 문화적 힘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성분에서 생깁니다. 캡사이신은 혀의 통각 수용체를 자극해 ‘매운맛’을 느끼게 하지만, 실제로는 맛이 아니라 통증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하게도 이 통증에서 쾌감을 얻습니다. 캡사이신이 뇌신경을 자극해 엔도르핀을 분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엔도르핀 덕분에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생리적 반응 덕분에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은 문화적 요소와 생물학적 요소가 함께 작용해 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추는 건강식품으로서도 탁월합니다. 고추 속 비타민 C는 감귤의 2배, 사과의 30배나 됩니다. 게다가 조리 과정에서 다른 채소보다 비타민 손실이 적습니다. 항산화 작용과 면역력 강화, 신진대사 촉진 등 다양한 효능 덕분에 고추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영양의 보고입니다. 캡사이신은 혈류량을 증가시키고 소화를 돕고 지방 분해를 촉진해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입니다. 항암 효과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며, 유산균 발효를 돕는다는 점에서 김치 문화와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고추는 생기와 활력을 상징합니다. 고추가 빠진 한국 요리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매운맛은 한국인의 멘탈 지형과 음식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며, 고추는 그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매운맛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문화, 생리학, 역사까지 얽힌 복합적 현상입니다.
고추의 재발견: 김치·한식·세계화 속 한국 고추의 새로운 의미
고추는 단지 매운 열매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고추가루라는 형태로 완전히 새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김치입니다. 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발효식품이며, 고추가 없다면 지금의 김치 맛은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배추김치에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 젓갈 등이 조화를 이루며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냅니다. 이 가운데 고춧가루는 김치의 색, 향, 맛을 결정하는 핵심 재료입니다.
배추의 도입 역사와 김치의 발전 또한 고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추는 중국 화북 지방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약재로만 쓰였지만, 19세기 중반 고추가 양념으로 본격 활용되면서 김치 양념의 틀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빨간 배추김치는 고추가 정착한 이후에야 등장한 비교적 새로운 형태의 김치입니다. 고추와 김치가 만남으로써 한국 음식은 맛의 깊이가 달라졌고, 발효식품으로서의 가치도 폭발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한국 식품산업에서도 고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청양고추의 개발, 고추 품종 연구, 고추장 산업 등은 한국 농업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최근에는 ‘한국 고춧가루’가 해외에서 ‘글로벌 핫소스’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서양의 핫소스가 캡사이신 중심의 단순 매운맛이라면, 한국 고춧가루는 풍부한 향과 단맛, 흙 향까지 갖춘 입체적 매운맛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또한 고추를 활용한 한국 요리는 세계적 K-푸드 열풍과 함께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볶음, 찌개, 양념, 떡볶이, 라면 등 고추 기반 음식들은 강렬한 맛과 중독성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한국 고추 요리는 단순한 매운 음식을 넘어서 문화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추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추를 단순히 받아들인 데 그치지 않고, 그 고추로 완전히 다른 음식 세계를 구축한 것은 한국이라는 점입니다. 한국인이 고추를 통해 만들어낸 음식과 문화는 이제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고추는 역사적 논쟁을 넘어 ‘한국식 매운맛’이라는 고유한 문화 자산으로 재탄생했습니다.